"언제 예수가 화려한 옷을 입고, 권세를 누리며, 호화로운 삶을 추구하였던가? 예수는 결코 그러지 아니 하였다."
작성자:
Seongho Hong
심지어, 성경에서 조차 예수의 족보는 일치하지 않는다. 누가복음은 예수가 다윗의 아들중 하나인 나단의 후손으로 기술하고 있다(눅3:31), 반면, 마태복음은 예수가 다윗과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 1:7) 다윗 아래로 예수의 족보는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족보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국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라 일컫는 아버지인 요섭과 피가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동정녀의 혼외자가 아닌가?
마리아가 다윗의 후손이라 주장 했다면 어느 정도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이 수긍이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예수를 다윗왕의 후손으로 그 족보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고 영화로웠던 왕국을 일구었던 민족의 불세출의 영웅 다윗을 예수에 대입함으로써 예수의 권위를 높이고 예수를 신의 반열에 올리고자 했던 추종자들의 악착 같은 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섬기는 예수를 절대적인 권위로 포장하여, 자신들의 위치를 높이고자 함이 아니었는가?
성경에서 예수는 필요에 따라 여러 다른 모습으로 그들의 이익과 주장을 옹호한다. 다윗 왕조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왕으로써의 예수, 국가의 틀을 완성한 위대한 민족 지도자인 모세를 계승한 제사장으로써의 예수, 억압받고 고통 당하는 민족의 나갈 길을 제시하고자 신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로써의 예수, 심지어 그들의 부족신이 현신한 아들로써의 예수. 예수는 그들의 주장과 요구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한번도 보지 못한 사도 바울이라는 자는, 그가 예수를 환몽 속에서 조우하였다 주장하며, 필요에 따라, 구약성경에 있는 온갖 인물과 사건들을 예수에게 대입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름도 생소한 아브라함 시대의 인물 멜기세덱을 예수의 모형으로 그리고 있다거나(히브리서 7장, 히브리서가 바울의 서신이 아니라는 근거있는 주장은 논외하기로 하자), 심지어 이스라엘 민족이 주장하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을 예수의 모형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로마서 5:14) 그에게 예수는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 재물로 신에게 바쳐진 어린 양같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신에게 바쳐진 온갖 종류의 재물 이었다. 이토록 바울은 참으로 다양한 화법을 통해 예수를 해석하고, 그럼으로써 에수를 추종하는 무리들 가운데 자신의 기반과 영향력을 넓혀 나간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는 확실히 타락하였고, 부패 하였으며 사악하였다. 그들은 믿음을 강요하였고, 민중을 현혹하여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수탈하였으며, 심지어 수많은 생명을 신의 이름으로 죽이기까지 하였다. 교회에는 온갖 금은 보화로 가득 장식 되었고, 그들의 음악과 문화는 민중의 삶과는 무관하게 점점 화려해졌다. 믿음을 강요하여 받아 드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가혹한 신의 저주를 서슴없이 퍼 부 얻고, 그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과 결탁하여 그들의 권세를 장악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 화려한 십자가 불빛 아래 교회에는 예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빛나는 십자가와 면류관은 교회 권력을 중심으로 한 부패한 권력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들은 항상 예수와 그들의 하나님을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였으며, 그들에 의하여 예수는 새로운 얼굴로 다시 세상에 등장하곤 하였다. 신의 뜻은 그들의 입맛에 따라 항상 바뀌었으며, 그들에게 저항하는 민중들에겐 새로운 개념의 처형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들은 천국을 만들고 지옥도 만들었으며, 다양한 형태의 죄도 만들었다. 그들은 이단과 사이비를 만들었으며, 최후 심판이라는 참으로 가공할만한 무기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러한 처벌과 심판을 벗어날 수 있는 헌금이라는 솔루션도 함께 창조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언제부터 인지,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를 덤테기 쓰고, 죄인이라고 괴로워하며, 열심히 벌어서 교회에 헌금으로 바치고 나서, 마음의 위로를 받는 참으로 웃지못할 저주에 갖혀 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은 안다. 이 모든 것이 예수의 뜻과는 너무나 먼 이야기 라는 것을. 언제 예수가 화려한 옷을 입고, 권세를 누리며, 호화로운 삶을 추구하였던가? 예수는 결코 그러지 아니 하였다. 그는 늘 가난하고 헐벗은 민중 속에서 함께 하였으며, 자연에 있는 무화과로 배고픔을 해결할 만큼 가난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옷 두벌만을 가지고 다니라 할 만큼 가난과 친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생의 많은 부분을 광야에 서 있었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 아니라는 가르침을 설파 할 정도로 가난을 초월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너무도 간단하고 명료하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이세상을 낙원으로 만들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다. 사랑의 공동체로써 서로 도우면서 평화롭게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천국이라는 것이다. 단컨데, 결코, 그를 믿으면 짓지도 않은 죄가 다 없어지고, 그를 믿으면 일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커다란 돈이 생기고, 그를 믿기만 하면 온몸의 류마티스 관절염 각종 불치병까지 다 낳으며, 그를 믿으면 집 나갔던 마누라까지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사를 체험 할수없다. 이것은 절대로 기독교 신앙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과 너무나 다른 이야기 인 것이다.
교회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처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쓸데없이 따먹는 바람에, 몹쓸 죄에 감염되어 그 죄의 유전자가 온 인류에 자자손손 대물림 되었다는 것이다. 그 죄 바이러스는 너무도 강력하고 비싸서 왠만한 재물을 바치지 않으면 좀처럼 치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열받아서 그랬는데, 시간이 좀 지나서 열이 좀 식은 후에 보니, 아 내가 좀 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용서의 차원으로 자신의 아들을 대신 재물로 바쳐 자신의 화를 푸는 체면을 차리고, 앞으로도 아들 봐서 많이 참을 테니 교회에 헌금도 잘 받치고 목사님도 하나님이라 생각하여 잘 모시고 살아라 라고 하셨다 한다. 또한, 목사님이 너의 인감 도장 가져오라 하면 잔말없이 갖다 바치고, 목사님이 빤스 한번 내려봐라 하거나 가슴 한번 만져보자 하시면 즐거운 마음으로 빤스를 내리고 가슴을 내드려야 한다고 하셨다. 만약, 목사님 잘 못 모시시거나, 교회에 헌금 열심히 안내고, 목사님 피곤한데 안마 같은거 안해주면, 나중에 하나님이 다시 와서 말 안듣는 놈들 개작살을 내버린다는 준엄한 사랑의 말씀도 같이 전하고 있다.
샤머니즘은 이상심리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신령, 정령, 사령 등)와 직접 접촉ㆍ교류하고, 이 사이에 예언, 탁선, 복점, 치병, 제의 등을 행하는 인물(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주술ㆍ종교적 형태로 나타난다.[1] (위키피디아) 흔히 무당이라고 일컫는 눈동자 풀린 사람들에게 재물을 바치면서 미친년 널뛰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 모든건 다 잘될꺼야 하는 자기 최면을 말한다. 샤먼들은 우선 사람들을 공포속에 몰아 넣어 패닉된 상황에서 이성을 마비 시키고,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어, 그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지배 한다. 그렇게 지배 당한 사람들은, 샤먼들에게 인감도 갖다 바치고, 빤스도 언제든지 내리고, 가슴도 즐겁게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이 샤머니즘에 빠졌단다. 그래서 그녀는 샤먼에게 나라의 국쇄도 갖다 바치고, 육체와 정신을 조정 당했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이 나라를 통째로 그 악귀 같은 샤먼에게 바쳐 샤먼의 왕국으로 만들려고 한것이다. 그런데, 그 샤먼이라는 놈이 자신은 예수의 추종자요, 예수와 하나님이 뒤를 봐주는 목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저기서 그 샤먼 같은 목사들이 대통령을 편들고 있다. 대통령한테 힘내라고 한다. 힘내서 더욱더 열심히 빤스도 내리고 가슴도 내주라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세상이 참으로 어수선하다.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이 이토록 쪽팔릴수가 없다. 내가 이리 쪽 팔리고, 자괴감이 들다 못해 모멸감까지 드는데, 우리 국민들은 오죽 할까? 수치심과 분노감을 어찌하란 말인가? 신앙이란 이름하에, 예수와 하나님의 이름 아래, 이토록 극악 무도한 만행들이 진행 되었다니? 예수가 땅치고 통곡 하실 일이다. 어쩌면, 예수가 쏘주 한병 퍼 부우면서, 깊은 담배 연기 한모금 마시면서, “씨발 이럴려구 내가 십자가에 매달렸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라” 하실지 모르겠다.
이나라를 이지경 까지 만든 건, 스스로 샤먼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기독교 목사들의 공이 크다. 그들이 이나라를 이렇케 망친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의 뜻을 왜곡하고 조작하여, 자신들의 야욕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대한민국 교회에는 하나님과 예수는 없다. 오로지 수많은 물질과 광란의 잡신들만이 즐비할 뿐이다.
오늘도 낮은 곳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선한 삶을 살아가는 형제들이여, 지금 이 참극을 어찌 보아야만 한단 말인가? 나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부패한 권력에 저항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권력뒤에 숨어 조정하는 저 목사의 탈을 쓴 사악한 샤먼들을 이땅에서 모조리 박멸 해야만 한다. 그들이 있는 한 예수가 죽음으로 인류에게 호소한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이땅에 오지 않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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